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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이야기 [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연결의 미학(영남일보)
작성자 museumsoo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초연결성 시대 ‘무한의 창조’
 
 


 

 바느질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


 


 

바느질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


 

벚꽃은 참으로 미묘한 꽃이다. 멀리서 그 환한 미소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 그 꽃그늘 아래 서면 고요한 슬픔이 느껴진다. 한 잎 한 잎 떨어진 그 꽃들의 색은 세상의 언어 속에 속해 있지 않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수한 점들이 모여 성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봄날 벚꽃나무 아래는 고요한 슬픔 속에 깃든 평화를 만나게 하고 성스러운 시간 속에 머물게 한다.

이런 느낌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베갯모 수가 있다. 낱낱의 베갯모는 그저 옛 사람들의 일상에서 귀하기보다는 꼭 있어야 했던 일상적 물건이었다. 거기에 놓인 수는 그저 한 송이의 꽃, 문자 등 소박하지만 베갯모들을 켜켜이 쌓아 놓은 그 앞에 서면 벚꽃 그늘 아래에서 느꼈던 순결한 기쁨을 맛본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옛 여인의 마음속에 깃든 어떤 내밀한 이야기들이 색색의 수를 따라 한 올 한 올 풀어지는 듯하다.

기계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없었던 옛날에는 바느질이 노동이기도 했다. 가족들의 옷과 버선을 일일이 손으로 바느질해야 했던 그 시절에 바늘은 매우 중요한 도구였다. 그래서 바늘 한 개를 잃은 슬픔을 애도하는 ‘조침문(弔針文)’이 쓰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순조 때의 유씨 부인은 오랫동안 함께한 바늘이 부러지자 바늘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픔을 토로한 제문(祭文)을 쓴다.


부녀자에 중요한 도구
오랫동안 쓴 바늘 부러지자
슬픔 애도하는 ‘조침문’
바느질 도구 의인화 소설
‘규중칠우쟁론기’ 나오기도

바느질의 연결망
아무리 귀한 바늘이라도
실이 꿰어져야 옷 짓고 수 놓아
양자가 합쳐져 놀라운 생명감
느리고 작아도 이음의 미덕보여


“인간부녀(人間婦女)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데,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物件)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지 우금(于今) 이십칠년이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 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을 겨우 진정해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바늘 한 개를 27년간이나 고이 간직해 사용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다. 조침문에는 바늘을 얻게 된 연유와 소중한 그것을 이웃 친지들에게 나눠준 정황을 적고 있는데, 그중 하나를 택해 오랫동안 사용하다가 부러진 것이니 남다른 정회가 있을 법하다.

그러나 이런 바늘에 실이 없다면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래서 예로부터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라는 속담은 바늘과 실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해준다.

조침문의 표현대로 바늘이 아무리 “추호 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두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 한지라”고 할지라도 실이 없다면 낱낱의 사물들을 꿰어서 옷을 만들거나 수를 놓을 수 없으니 실이야말로 고요히 따르는 미덕을 가지고 사물을 제자리에 맞추기도 하고 아름다운 수를 그려내기도 했다.

이렇게 실과 바늘뿐 아니라 바느질에는 다양한 도구가 필요한데 그 각각의 도구인 가위·골무·자·실패·인두 등이 의인화되어 있는 소설 형식의 이야기도 있다. ‘규중칠우쟁론기’다. 바느질에 사용되는 바늘·골무 등을 의인화해 각시부인·할미 등으로 설정해 그 역할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이야기는 규중부인에게 각자의 불만을 토로하면서 흩어지지만 결국 한 벌의 옷을 짓기 위해 그 소임과 역할을 다시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바느질의 장면과 도구들과 그 이름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당시 여성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바느질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떤 측면에서는 진부해 보일 수 있다. 조침문이나 규중칠우쟁론기의 교훈적인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 가치의 지향점을 공유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바느질 행위는 단조롭고 또한 느린 일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도 없고 공간을 거슬러 갈 수도 없다. 그래서 어쩌면 이것은 그동안 여성의 취미에 속한 사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바느질이 가진 연결의 속성은 사물의 확정성과 새로운 가치 부여를 가능하게 한다. 그 연결성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따라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열어 보여준다.

이처럼 사물을 잇고, 옷을 지으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이 바느질의 행위에 대해 청나라 ‘연감유함(淵鑑類函)’에서는 “수(繡)는 수(修)”라고 했다. 수를 놓는 일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바느질을 하는 일은 일상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실용적 목적뿐 아니라 수양의 방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바느질의 연결성과 확장성은 현재에도 치유적 본질을 가진 가치있는 행위이며 사물과 사물, 사물과 사람을 잇은 초연결성의 시대에 새로운 연결망을 만드는 기본적인 개념으로 작용한다. 바늘 한 끝에서 나온 점과 점을 이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어 면이 된다. 점으로 시작해 무한대로 확장하는 확장성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바늘을 끝없이 끌고 나가는 에너지와 순리대로 따르는 실의 오묘한 만남에서 출발한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라는 의미는 그래서 여러 가지 관계성을 의미한다. 바늘과 실이 함께 이뤄낼 수 있는 무한한 창조성은 세상만물의 이치가 이처럼 서로 다른 양자가 함께할 때 놀라운 생명감과 창의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봄꽃이 떨어진다. 옛 사람들이 천녀의 옷을 표현할 때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했다. 지상에 있지 않은 옷이 천의무봉이었다. 그러나 바느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패브릭 캔 기술이 개발되고 옷이 설계된 대로 바느질 자국 없이 편직되는 시대에 와 있다. 하지만 자세히 다시 들여다보면 이 같은 첨단기술에도 한 올 한 올 한 개 한 개의 섬유와 실의 결합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첨단의 시대가 되어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전히 점과 점을 잇고 선과 선을 잇는 바느질의 기본이다. 느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는 바느질이라는 행위는 우리에게 연결·이음의 미덕을 보여준다.

박물관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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