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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이야기 [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기해년(己亥年) 새해 소망
작성자 museumsoo
봉황 깃든 ‘구봉침’베고 꿈길에서도 다산과 태평성대 기원


 

 


다양한 형태의 구봉침 자수 베갯모

 

거울처럼 쨍하게 콧날을 세우는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별빛을 받은 밤은 새로 산 검은 뉴똥 치마처럼 윤이 났다. 바느질감을 고르다가 수를 놓고 싶어 엄마의 반지르르한 뉴똥 치마 넓은 끝자락을 싹둑 잘라버린 기억은 짧아진 치마 길이만큼 시린 종아리를 만져야 했던 아픈 추억이다.

 


호롱불 아래 바느질감 지새운 할머니
바늘귀에 실 꿰어 드리던 그리운 추억

아들 점지해 주기 바라는 간절한 염원
어린새끼와 수컷‘봉’ 암컷‘황’수놓아
19세기 융성한 민화적 세계관 재구성
태몽 후 반듯한 행실과 섭생으로 태교


하지만 늘 숨을 곳이 있었다. 곶감 한 개로 울음을 달래주던 할머니의 넉넉한 치마품이 있었기에 아픔들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방금 불을 지피고 들어오시면 불 냄새가 좋았고,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하고 오시면 박하향 같은 찬 기운과 함께 물소리가 아직도 치마폭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무참히 싹둑 잘려져 나온 자투리 뉴똥 천은 저 혼자서도 반질거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 가위를 들고서는 자주 머뭇거린다. 미리 잘라야 할 곳과 자르면 안 되는 부분을 가늠하느라 시간이 흘렀다. 자른 뒤에 되돌릴 수 없기에 가위질은 언제나 최후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 머뭇거림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로 반듯하게 계산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이며 가능한 일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가늠하지 않았어도 멋진 바느질이 되기도 하고, 예쁜 꽃이 놓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잘라도 소용이 닿도록 만들어 가는 지혜는 “자질 잘하는 며느리는 써도 가위질 잘하는 며느리는 못 쓴다”는 옛말을 무색하게 하였다. 자른 뉴똥 천 조각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곱게곱게 개어서 장롱 깊이 잘 보관해 두었던 치마를 못 쓰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너무 큰 잘못이었기 때문에 그다음 기억은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야단을 맞으면서도 생경스럽게 손 안에서 빛나던 그 부드럽고 신비한 검은 빛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짓이겨 가루를 낸 뒤 어둠 한줌으로 잘 버무린 아득한 심연을 내게 보여주었던 것 같다.

그 위에 색색이 놓인 실들은 무엇이든 검은빛 때문에 밝게 빛났다. 그 깊은 검은 빛 때문에 지금도 입지 않은 옷이 여러 벌 있다. 그 옷을 입는 순간에 나는 스르르 그 검은 빛 속으로 잠겨 드는 마법의 순간을 느낀다. 어쩌면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가만히 엎드려 있을 때 느꼈던 그 아득한 깊이를 모를 편안함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늘 호롱불 아래에서 연신 바느질감들을 펼쳐 놓은 채 버선을 깁고, 이불깃을 풀 먹여 다듬이질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도회지로 떠나서 자주 오지 않는 며느리가 야속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색하지 않으셨다. 그 서운한 한 귀퉁이를 어떻게라도 채워줄 요량으로 호롱불 아래 바느질감을 놓고 앉으시면 바늘귀에 실을 꿰어드렸다. 아침 일찍 솥뚜껑 여는 소리가 부엌과 안방으로 난 작은 창으로 들려오면 얼른 일어나 불씨를 피워 불을 지폈고, 이른 새벽부터 넓은 대청마루를 신나게 닦기도 했다. 한겨울엔 닦고 돌아서면 걸레질한 물이 얼어 마루가 서리 내린 것처럼 하얗게 말라갔다. 작은 손을 호호 불며 그렇게 하고 나면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이 좋았다.

 

가끔은 꽃무늬 이불호청들을 다듬이질하셨다. 그 곁에서 다듬이 장단을 듣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다. 구겨진 면천들이 다듬이에 곱게 반질거리고 그 장단은 활기차고 따뜻했다. 너무 세게 해서 천이 해지면 안 되고, 너무 힘이 없어서 반듯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끔은 천 위를 두드리던 다듬이가 쨍하고 다듬이돌을 칠 때도 있었다. 아린 종아리 때문에 눈물이 젖은 채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잠시 잠이 들면 화끈거리던 종아리는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딸아이는 커다란 곰 인형을 안고 잠이 들었다. 학교에서 학원까지 종일을 시달린 곤한 마음을 곰 인형에 맡기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밤이 깊으면 호롱불 아래 할머니는 옛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아버지도 할머니가 ‘오모짱’처럼 예쁘다고 늘 이야기하셨으니 두 분은 참 금실이 좋았던 것 같다. 밀랍에 참기름을 넣어 만든 밀기름을 속눈썹에 발라 눈을 크게 뜨지도 못하고 치른 첫날밤을 지낸 후로 할머니는 늘 좁은 집 뒤의 정원에 가서 칠성님께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비셨다고 한다. 힘들게 점지한 아이를 잘 태교하기 위해 남의 집에서 얻어온 음식은 삼갔고 한걸음 걷는 것도 조심스럽게, 베고 자는 베개도 당연히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구봉침이었다. 이 구봉침은 7마리의 어린 새끼와 봉(수컷)과 황(암컷)이 함께하기 때문에 구봉침이다. 아마도 자수 베갯모 중에서 이 구봉침이 가장 많은 수로 남아 있는 것도 아들을 점지해주기를 간절히 염원한 여인들의 기원 때문일 것이다. 이 구봉침 도안은 오동나무에 봉황이 깃드는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세화(歲畵)인 민화의 의미를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다산의 의미를 강조하였고 모란을 수놓아 부귀의 소망도 함께 표현하였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공간에 19세기에 융성하였던 민화적 세계관을 모두 압축하여 재구성하였던 것이다. 봉황은 살아 있는 곤충과 풀은 먹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이 자연의 절도에 맞았다고 한다. 봉황은 이러한 고상하고 품위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어 왕비에 비유되거나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겨져 궁중의 문양에 많이 사용되기도 했다.

 

할머니도 잉어를 받아든 꿈을 꾸고 아버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옛 선비가에서는 태몽과 함께 태기를 느끼면 태실에서 태교에 힘썼는데 안동에는 약봉 서성이 태어난 약봉태실(藥峯胎室), 대산 이상정이 태어난 대산태실(大山胎室) 등이 남아 있다. 특히 퇴계 선생의 어머니인 춘천박씨의 태실은 ‘성림문(聖臨門·경북도 민속문화재 제60-4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공자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퇴계 선생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성림문이라 명명했다 전해진다. 태실은 태몽을 꾼 뒤에 출산할 때까지 임부의 반듯한 행실과 섭생으로 태교를 하는 주요 공간이 되었다. 특히 퇴계는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와 가을에 밤이 익어 밤톨이 마당으로 떨어지면 언제나 손수 주워 담 너머로 던졌을 정도로 깨끗한 성품을 지녔던 분이었다. 그러한 성정이 이미 이 태실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도 봉황이 오동나무에 깃든 구봉침을 베고 누워 꿈길에서도 태평성대를 기원해 볼 일이다.

박물관수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