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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이야기 [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500년 전 자수를 사랑한 소세양
작성자 museumsoo
조선의 선비, 中 자수 명인 찾아 ‘자수첩’ 수놓은 사연은…



앗! 순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순식간에 불에 덴 자국처럼 선연한 상흔이 남았다. 두꺼운 면천을 높은 온도로 다림질하다가 얇은 원피스를 꾹 힘주어 누른 탓이었다. 얇은 사(紗)는 그만 견디지 못하고 듬성듬성 깎다가만 머리처럼 군데군데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나고 말았다.


조선 중기 500여년 전의 청송서 자수첩의 글씨를 보았을 때의 마음이 그랬다. 예리한 진동이 마음을 스쳐갔다. 불에 덴 듯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마음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아직도 이렇게 선연(鮮姸)하게…. 글씨는 부드러운 필세를 잘 살려 수가 놓여졌다. 글씨의 테두리는 이음수를 꼼꼼하게 놓았고 푼사실로 평수를 놓아서 마무리했다. 테두리의 이음수는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서 글씨의 형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채워진 평수들은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군데군데 멸실되고 말아서 그 모습이 마치 불에 데어 사라진 비단 천을 바라보는 듯했다.




조선 문장가, 대제학 역임한 ‘소세양’
16C 최고 명필 성수침에 글씨 부탁
명나라 자수 명인 수소문해 ‘첩’제작
당대 최고 시인 이태백 한시 내용 담아


가보로 삼고 간직한 사연 상상의 여지
송도 기생 황진이와 사랑 연관 추측도




그 자수첩은 조선 최고의 학자요 문장가였던 소세양(蘇世讓)으로부터 일화가 전개된다. 소세양은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중국으로 사행을 하면서 평소부터 존경해 마지않았던 후배인 성수침(成守琛)에게 글씨를 부탁해 소지한 채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던 12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그는 당시 명나라 수도였던 연경으로 가서 그곳에서 백방으로 자수 명인을 수소문 끝에 만나서 후한 값을 주고 성수침의 글씨를 수놓게 해 이를 가지고 돌아왔고, 이를 첩으로 만들어 가보로 삼았다 한다. 조선의 명필과 중국 자수 명인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을 시공을 초월해 알 수 있게 된 것은 조억(趙億)이란 이가 1659년에 쓴 자수첩의 발문이 남아 있어서 가능했다. 발문에 의하면 이 첩은 소세양으로부터 임진왜란 무렵인 1594년에 평산 신씨의 소유가 되었고 정유재란 당시 호남과 해서로 피란해 병화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평산 신씨 신득준(申得濬)이란 이는 외손자에게 이를 전했고 그가 바로 발문을 쓴 조억이라는 내용이다. 발문에는 이 첩이 진주 소씨로부터 평산 신씨로, 그리고 다시 한양 조씨에게로 전전한 내력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전래된 이 첩의 소장 내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세양이 성수침에게서 받은 한시 두 수는 모두 중국 최고의 시인이었던 이태백(李太白)의 작품이다. 그중 ‘登廬山吾老峰(여산 오로봉에 올라서)’란 시의 내용이다.


“廬山東南五老峰(여산 동남쪽의 저 오로봉이여)/ 靑天削出金芙蓉(치솟은 그 모습 금부용 같은데)/ 九江秀色可攬結(구강의 풍광 손에 잡힐 듯하여)/ 吾將此地巢雲松(내 이곳에다 쉴 집 지어 보려네.)”


중국의 당대의 시를 16세기의 대표적 명필이요 학자였던 성수침이 써주었고 그 글씨를 수를 놓아 귀히 가보로 간직하였다는 이야기는 예사롭지 만은 않은 듯하다.


성수침의 행서체는 조선 초 이래 유행되던 조맹부(趙孟)체와는 다른 독특한 것으로, 당대는 물론 이전에도 그 예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자성일가(自成一家)’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서법을 계승했다는 서계 박세당은 그 글씨의 특징을 ‘탈속(脫俗)’과 ‘기일(奇逸)’에 두었다는데 적절한 평가라고 본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이처럼 놀라운 성취에도 이를 그저 ‘여사(餘事)’로 여겼다. 그러함에도 조선의 선비들은 그의 글씨를 보배로 여겨 서첩으로 꾸며 가보로 간직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소세양은 성수침의 글씨를 단순히 글씨 작품으로 간직한 것이 아니라 이를 자수로 놓아 보관한 것에는 특별한 연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세양의 행적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는 퇴계도 지내지 못했던 대제학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또한 “훌륭한 재주가 있어 글씨도 잘 쓰고 시문에도 능했다”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의 행적에 송도 기생 황진이와의 사랑이야기가 흥미롭다. 황진이가 지은 한시 ‘야사하(夜思何)’는 그녀가 소세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부른 노래이다. 유명 가수 이선희가 번안하여 불러 그 노랫말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소세양이 중국으로 사행을 할 때 송도를 거쳐갈 수 있었고, 당시 송도의 황진이는 석학 서경덕으로부터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서경덕의 정사를 자주 방문하여 당시를 배우고 익힌 일화가 전하기도 하는 것과 유관한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조선의 선비가 중국까지 가서 수를 놓아 자수첩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다른 상상의 여지를 준다.


야사하를 번안한 이선희 노래의 한 소절에 황진이의 마음을 담아 들어본다. 소세양을 향한 사랑이 화인(火印)처럼 찍힌 황진이의 가슴이 느껴진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얘기를 해 주세요.”


다림질을 하다보면 얇아서 살짝 열기만 가도 되는 천이 있고 면처럼 꾹 눌러도 잘 펴지지 않는 천도 있다. 작은 언쟁의 열기도 견디지 못하고 마음 아파서 며칠 몸살을 했던 그 일이 지금 눈앞에서 너덜너덜 해어진 옷과 오버랩 된다. 애꿎은 면 천을 눈 흘기며 얇은 천부터 다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지 못했던 일에 때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하지만 꽃잎 떨어지는 풍경 앞에서는 비단결처럼 떨고 폭풍처럼 힘든 일 앞에서는 저 뜨거운 열기도 꿋꿋하게 견디는 면 천처럼 견고한 단단함으로 서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박물관수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