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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이야기 [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구국 정신으로 이어진 여공(女功)
작성자 museumsoo

[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구국 정신으로 이어진 여공(女功)

 

발행일 2020-12-18


집안·마을·나라 평안 다독이는 '바느질의 인문정신'

근대 여성이 갖춰야 할 덕목 '바느질'
어려운 살림살이 지탱한 든든한 근간
독립운동가 남편 옷 지으며 뒷바라지
針工으로 나라의 부채 갚는데도 솔선
작은 바늘 틈, 세상 중심 지킨 지렛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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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임유동 선생의 유품으로 알려진 무궁화 꽃수.
겨울 새벽 우포늪을 거닐면 안개에 젖은 풍경이 어머니의 젖은 속눈썹을 바라보는 것 같다. 잘린 태백산맥의 허리를 부여잡고 백두대간을 흘러내린 슬픔이 다다른 곳이다. 새벽 푸른 이슬이 실낱같은 희망으로 맺힐 때 물총새 한 마리가 늪 위를 차고 오른다. 절망과 환희의 눈물까지 푸른 이슬로 내려앉은 우포늪에서 이 땅의 어머니를 만난다.

깊고 고요한 모든 색깔의 슬픔은 곰삭아 내려 더는 가라앉을 수 없는 데까지 가서 진토가 되어 늪이 되었다.

나는 묻는다. 어머니는 언제 저 희망들을 버리실 건가요? 이제 더는 아무것도 품을 수 없는 가슴이 되신 줄 알았는데, 아직 버리지 못한 저 물풀들의 정원에서 무엇을 기르시는 건가요?

실과 바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동안 어머니들의 이야기에는 여공(女功)이라는 숭고한 노동이 사무쳐 있음을 알았다. '여공(女功)'이란 여성들의 길쌈과 바느질하는 솜씨 또는 그 기술을 말한다. 근대까지만 해도 여성이 갖춰야 하는 주요 덕목 중 하나였다.

바느질의 역사는 유구하다. 한반도에서도 600년 이전 유물로 추정되는 직물 조각과 실이 꿰어진 바늘이 함께 발굴되어 그 이전부터 바느질이 행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침선 양식이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며 신라 선덕왕 3년(634)에 세운 분황사석탑에서는 금속제 바늘과 침통 및 가위까지 출토된 바 있다. 또한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에서 버들고리를 음식용 그릇이나 옷고리, 반짇고리로도 썼다는 기록이 실려있다.

신라 유리왕 때도 여자아이에게 바느질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지어진 '여사서언해(女四書諺解)'에는 "아들을 낳으면 상 위에 누이고 구슬을 주어 놀게 하고 딸을 낳으면 상아래 누여서 실패를 가지고 놀게 한다"고 하였다.

조선 성종 3년에는 대비인 소혜왕후(1437~1504)가 쓴 '내훈(內訓)'에는 "열 살이 되면 여자는 실과 골무를 다스리며 베와 비단을 짜고 곱고 가는 끈이나 굵은 실을 꼬며 여자의 일을 배워서 의복을 만들어 바치게 한다"고 여자가 지켜야 할 덕목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길쌈과 바느질은 숙명적으로 여성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여공으로 집안의 의복은 물론 경제활동을 이루었고 사회참여로 이어진 역사의 현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서 여공(女功)은 비록 크게 조명을 받지는 못했어도 몸과 영혼까지 어루만져 누비던 그 바늘의 작은 틈은 세상의 중심을 지킨 지렛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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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허은 여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애국선열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손부(孫婦)인 허은(許銀·1907~1997) 여사가 쓴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와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의 며느리인 이해동(李海東·1905~2003) 여사가 쓴 '만주생활 77년'과 같은 책에는 우리 어머니들이 만주에서의 어려운 독립운동의 살림을 어떻게 살았는지 잘 기록되어 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가 부족해 삼시 세끼가 녹록지 않았다. 양식이 없을 때는 좁쌀 쭉정이로 죽을 끓였다."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대량생산을 했다.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특히 이항증(1939년생·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에 의하면, "어머니는 만주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자 사람들을 이끌고 단추를 달고, 옷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등의 일을 해준 품삯으로 식량을 사 올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허은 여사의 구술 기록에서도 "시집올 때 해온 옷을 입어보지도 못하고 혹한의 겨울과 병마 때문에 먹을 것이 없자 패물과 함께 팔아서 식구들의 양식을 마련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의 아내뿐 아니라 여성의 바느질은 사회의 든든한 근간으로 역사를 지탱해 왔다. 그것은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성실한 노동과 정직한 공감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 역사적 근거로는 독립투사들에게 보낸 '한반도 무궁화꽃 수'를 보면 더욱더 확신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남궁억(1863~1939)은 비록 독립을 보고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청년들에게 독립의 꿈을 버리지 말 것을 교육하였다. 그 일환으로 소녀들에게 독립투사들에게 보낼 '한반도 무궁화꽃 수'를 고안하였고 그 수들은 멀리 간도로 보내지게 된다. 말과 글을 빼앗긴 땅에서 한반도에 활짝 핀 무궁화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그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했을 것이다.

무궁화 묘목을 심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옥에 갔던 시절에 무궁화꽃 수를 놓는 일조차 쉽지 않아서 때로는 일부러 꽃잎 하나를 빠뜨리고 놓아서 다른 꽃이라 둘러대기도 했다 한다. 한 땀 한 땀 놓은 그 꽃 수에 담은 독립의 열망과 간절함은 보이지 않는 강한 정신력으로 시대의 고통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그 무궁화 꽃수는 무수한 말과 글보다 더 많은 마음을 담은 편지가 되어 간도의 독립 투사들의 가슴마다 태극기와 함께 품어졌을 것이다.

조금 더 거슬러 가보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이 되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1908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한시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시기 이후 1910년 한일 강제병합과 이어진 독립운동의 격동 속에서 많은 문헌과 사료들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국채보상운동에서 보여준 여성의 참여 정신 만큼은 매우 귀중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여성 참여의 기폭제가 되었던 대구의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존재는 대구의 자긍심으로 이어져 왔다.

"남성들은 금연으로, 여성들은 스스로 노리개며·비녀·반지 등의 패물과 반찬을 줄여서 의연하였다."

박용옥의 논문에 따르면 남의 집 더부살이나 침공(針工)으로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빈천한 여인들까지 나라의 부채를 갚는 일에 의연(義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를 기록하고 있는 대한매일신보나 제국신문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묘동에 사는 부인 김씨는 올해 나이 30의 혈혈단신 과부로 지내며 바느질로 생업을 꾸려가고 있는데, 이번 국채보상의 일을 위하여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그 뜻으로 자기가 가진 은가락지를 신화 2원으로 전당 잡혀서 농포동 본사 지사의 직원 정우택 씨에게 납부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1일자 2면)

1907년 3월29일자 3면의 대한 매일신보에는 김치홍의 딸인 14세의 여자아이가 바느질하여 모은 돈 1원을 보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제 더는 힘들게 여공을 보태지 않아도 옷감이며 의복들이 주변에 널려 있어 우리를 풍요롭게도 한다. 여공이 단순히 보조적인 역할로 치부되어 버렸던 역사처럼 여전히 바느질은 그저 여가의 활동쯤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드는 그 창조적인 역할은 끊임없이 이어져 우리의 정신을 헹구는 도구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땀씩 이어져 가는 '바느질의 인문정신'은 집안과 마을과 나라의 평안을 다독이는 치유와 명상의 편지가 되어 끊임없이 전해져 가야 할 것이다.
박물관 수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