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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이야기 [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태양 품은 꽃수의 강릉자수보(영남일보)
작성자 museumsoo
무지개 色 옷 똑같이 입은 나무와
 


 

얼마 전 박물관 수에서 유치원생들이 나비모양을 만드는 바느질 수업이 진행됐다. 가늘고 긴 실을 바늘에 끼우려고 애쓰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천 위에 바느질하는 것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색실을 고르고 한 땀 한 땀 연결해 가고 있는 모습이 여간 진지하지 않다.

아이들이 색실로 장식한 강릉자수보자기 속의 자수나비가 금방 날아나온 듯 예쁘다. 나비문양에 빨강·파랑·노랑색 실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면을 채우면, 그 색들은 서로서로 옆의 색을 받아주기도 하고 튕기기도 하면서 사랑스러운 울림을 만들어낸다. 나비가 색동옷을 입고 완성됐다. 노랑·빨강·보라·초록으로 반복되는 색상은 화려하면서도 자유로움을 주는데 여기에 사용된 색실은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각각의 생각과 느낌이 스며든 것이다. 박물관에서 아이들이 보자기를 감상할 때 제일 좋아하는 것이 강릉자수보다.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명쾌한 색상의 명랑함이 즐겁고, 마치 아이들이 그은 듯 단순하게 그어진 사물의 선이 친근감을 느끼는 하는 모양이다.

노랑·빨강·보라 초록의 반복, 화려함과 자유
나무·새 한몸, 현실과 다른 새로운 색감 부여
압축·생략의 美, 전통자수 방식과 다른 문양

사물의 근원적 형태 생략 않는 정면성의 법칙
고대 이집트 벽화·고구려 고분벽화 기법 같아
정적인 공간위 묘한 생동감…신비로움·숭고함


강릉에서 유행한 강릉자수보는 19세기 후반에 주로 제작됐는데 압축과 생략의 미가 있어 현대미술품처럼 보인다. 즉 전통의 자수들이 보여주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접근된 것이 바로 강릉자수의 문양이다. 대부분의 전통 자수는 꽃이며 새며 확실하게 형태를 감지할 수 있는 사실적인 수법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수놓아진 그 사물의 형태를 따라 이름을 지어 부르면 된다. 가령 모란꽃을 수놓았으면 ‘모란문 자수 베갯모’라든가, ‘모란문보(褓)’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하지만 강릉자수보는 언뜻 보이는 나뭇가지며, 새들의 모양을 따서 ‘수화문(樹花紋)’ ‘조화문(鳥花紋)’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하지만 무엇인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나뭇가지의 모양이 사방으로 길을 내듯 뻗어있고, 새의 문양이 보이니 그렇게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나무며 새들이 한 몸이 된 듯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사방으로 뻗은 대칭적인 조형성은 전통의 사실적인 자수에서 볼 수 없는 형태들이다. 그리고 그 구성보다 더 독특한 것은 색상이다. 마치 아이들이 나비의 색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느낌을 따라 선택한 색실처럼 본래 나무와 새가 가지는 색을 없애버렸다. 마치 무지개 띠처럼 혹은 색동천조각을 잇듯 나무와 새에게도 새로운 색감의 질서를 부여했다. 그래서 그것은 이미 현실의 나무, 새가 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치 하늘에서 바라본 것처럼 나무의 수형은 중심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어떤 근원적인 질서 위에 꽃이 피듯 혹은 새로운 싹이 나듯 반달모양의 잎들이 무성하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 모양은 움직임을 이룬다. 그래서 정적인 공간 위에 묘한 생동감을 준다.

강릉자수보에는 고대 예술이 갖는 몇 가지 법칙이 표현되어 있다. 사물의 근원적인 형태가 생략되지 않도록 하는 정면성의 법칙이 있다. 이 정면성의 법칙은 덴마크의 학자 랑게가 말하듯이 근원적인 미술의 목적에 부합되는 회상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술양식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슬람의 세밀화, 고대 이집트의 벽화,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 이러한 기법이 나타난다. 즉 현실적인 공간에서 시간과 시각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사물이 아니라 불변하는 그 무엇을 추구한 결과물이다.

색채에 있어서도 사물의 외현된 색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색의 원형들이 빨강·파랑·노랑·초록으로 서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하고 있다. 빛이 프리즘을 통해 분해되면 무지개 색으로 각각 색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강릉자수보는 불변하는 형태나 색의 원형을 찾아 절대적인 형식미를 완성했다.

박물관 전시장의 설명문은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울 수 있다. “강릉자수보는 나무에 새를 곁들여 구성한 수화문을 수놓았다. 수화문은 세계수(世界樹)나 무목(巫木)을 형상화한 나무이며, 새와 나무는 천상과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상징한다.” 이 설명문은 강릉자수보의 신비스러움과 독특함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해하기에는 어렵다. 아이들과 천상을 잇는 새와 나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왜 나무와 새가 같은 색의 무지개색 옷을 입게 되었을까?” 이유를 물어본다. 마치 흰옷을 입고 무대 위에 서면 조명이 비춰주는 대로 색을 받아들이듯 그 사물의 외현적인 색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색들을 받아들인 것이라 설명한다. 과연 아이들은 알아들었을까.

“동그란 가운데의 저 원은 무엇으로 보이니?” 손을 번쩍 들어 아이들이 대답을 한다. “태양이오.” “나무의 기둥이오.” 확고하다. 의심이 없는 아이들은 둥근 것은 태양이고 태양을 품은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며, 하늘과 땅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숭고한 나무임을 금방 이해한다. 서로의 존재는 나무였다가 새이기도 하고 태양이기도 하고 다시 나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삶의 이치는 모르더라도 조심스레 바느질을 해가면서 나비를 만들어가는 그들의 눈망울과 손끝에서 새로운 생명체는 만들어지고 있다.

강릉자수보의 이런 독특한 조형성은 산림이 울창한 강원도 지역의 환경에 기인하기도 하고 강릉단오제의 신대(神竿木)와 유사한 형태로 보인다는 연구(김선풍의 ‘제의와 축제로서의 강릉 단오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강릉보자기의 문양 속에 담긴 깊은 의미는 어쩌면 우리의 이해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와 사물이 너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것을 깨달았던 여인들이 그 깨달음을 전해주는 비밀의 문양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인들은 일상의 기도처럼 보자기의 수를 정성을 다해 놓았다. 평창올림픽이 꿈꾸는 세계 일화(一花)의 꿈은 이미 오래전 조선시대의 강릉자수보에서부터 그 염원이 담겨 있었던 것 인지도 모른다. 박물관 수 관장

<사진=박물관 수·동양자수박물관 제공>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은 경북대 미술학과와 동대학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을 졸업했으며 경주대에서 석사(문화재학), 대구대에서 박사학위(조형예술학)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사립박물관협회 이사, 대구시박물관협의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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