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수
| 로그인 | 회원가입

home 자료실> 자수이야기
조회수 381
자수이야기 [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국화 베갯수
작성자 museumsoo

손길 고운 여인의 국화문 베갯모…가을 국화향에 취해 잠드는 밤

다양한 국화문 자수 베갯모.
가을은 어디를 떠나든 아름답지만 며칠 전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마음은 특히 설렜다. 박물관수를 떠난 500여개의 베갯모들이 새로운 곳에 잘 전시되었을까 하는 기대와 염려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작은 박물관 한 벽면을 화사하게 채워왔던 베갯모들을 포장하기 위해 들어내던 날, 그대로 두었을 때는 몰랐는데 베갯모 모서리와 자수실이 저절로 툭하고 떨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8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있으면서 소리 없이 늙어갔던 것이다. 습도와 온도를 맞추어주고 빛도 들지 않는 아주 어두운 조명 아래 두었지만 저절로 삭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른 낙엽지듯 쇠잔하여 스스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특히 직물들이다. 조심조심 무진동차에 실려간 베갯모들이 서울 성북동의 구립박물관인 선잠박물관의 특별전시 ‘규방에서 피어난 우리 자수’전에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서울시에는 10여개의 구립박물관들이 있다. 이 구립박물관들은 시민 가까이에서 그 지역의 역사성을 대표하면서 살아있는 교과서로 시민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선잠박물관은 조선시대 세종 때 양잠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설치한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어있던 역사성을 고증해 만든 박물관이다. 규방여인들의 노리개며 복주머니들과 바느질 소품들이 전시장에 기품있게 전시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이 포즈를 취해 포토존이 되는 것은 단연 천개의 꽃이 핀 베갯모 앞이었다. 붉은 빛의 은은함이 시선을 끌지만 한 개 한 개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 섬세한 솜씨에 사람들은 감탄했다. 한 개의 베갯모는 그저 쓰임의 용도를 가지고 있지만 모였을 때 천개의 꽃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오랜 어머니들의 베갯수들이 이렇게 화려하고 따뜻하게 우리에게 옛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밝게 빛나는 조명이 마음에 쓰였고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로 베개의 실들이 삭아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 앞에서 탄성을 내지르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미소 때문에 내 마음도 들떠 있었다. 늘 곁에 두고 본 베갯모였지만 유독 국화문 베갯모에 눈길이 간다. 손길 고운 여인의 국화문 베갯수가 이토록 아름다운데 아름다운 수를 놓은 여인은 또 얼마나 고왔을까? 어디선가 가을빛 한줌을 풀어놓은 국화향이 나는 듯했다. 향기로움이 이토록 아득하여 여인들은 국화꽃으로 베갯속을 채우고 국화수를 놓았나보다.

가을국화는 선비의 맑은 지조와 은일사상을 드러내는 사군자 중의 하나지만 베갯수에서는 장수의 의미로 수놓아졌다. 맑고 담백하면서 오랫동안 은은한 느낌을 간직한 국화향은 무더기로 떨어지는 흰꽃별처럼 화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늘한 바위의 깊고 깊은 그늘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향(石香)과 닮았다. 그래서 그 향을 따라 마음의 문을 열고 있노라면 어디든 선경(仙境)이다. 이 국화는 예로부터 장수와 번영의 선약(仙藥)을 상징하였다. 옛날 주유자(朱儒子)라는 사람이 국화를 달여 마시고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도 이런 국화향취의 신비스러움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국화향은 은일(隱逸)한 선비의 삶처럼 그윽하기도 하고, 선비의 굳은 절개나 지조처럼 강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귀뚜라미 울기 시작하면 길쌈 할 채비
국화꽃으로 베갯속 채우고 ‘국화수’
장수·번영 기원 한땀한땀 정성 다해
선비 삶처럼 그윽…굳은 절개와 지조
여인의 마음담은 사랑·아름다운 노동


민화의 화제로도 국화는 자주 등장하는데 층층이 쌓인 괴석이 가진 장수의 의미와 국화의 장수의 의미를 더하여 고수(高壽)와 익수(益壽)로 해석된다. 즉 민화와 자수베갯모에서는 국화는 장수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러 국화문 베갯모 중에서 이 베갯모는 붉거나 푸른 비단이 아닌 엷은 회색바탕이다. 동그스름한 국화잎의 사실감과 색색이 다른 꽃 색, 그리고 간간이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어 소슬함이 느껴지는 것이 여느 베갯모와는 다르다. 그래서 서리가 엷게 내린 맑은 잿빛의 하늘을 배경으로 한 쓸쓸한 국화의 풍경이 떠오른다. 오른쪽에 두어 개의 갈대를 슬쩍 옆에 삐껴 수놓은 것이 가을의 정취에 대한 수놓는 이의 살뜰한 감정이 내비쳐진다. 귀뚜라미가 울면 여인들은 베틀에서 길쌈을 할 채비를 하였다. 칠월 칠석에 직녀와 견우에게 길쌈과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게 해 달라고 빌었던 베틀의 여인들을 담장 너머 긴 목으로 기웃거리던 국화의 한 자취가 베갯수에 숨어있다.

그 여인들은 수를 놓기 위하여 혹은 사랑을 위하여 삼단 같은 검은 머리를 풀었다.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뽑아 춘향이의 머리를 수놓는다. 그네 타는 춘향이의 곱디고운 치마가 바람에 부푼 모습을 수 놓을 때면 발그레 볼을 물들이며 행복한 미소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머리카락으로 수를 놓을 만큼 옛 여인들에게 있어서 자수는 온전히 정신과 마음을 담는 아름다운 노동이었다. 그뿐인가. 도톰한 입체감을 내기 위해 솜으로 속을 채우기도 하고 한지를 오려 붙여서 징금하기도 하였다.

고종 때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몸이 아파 궁에 출입할 수 없는 신하에게 그 아픔을 위로하며 베개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서 하사한 베갯수에는 금사와 은사의 고급스러운 궁수로 놓아졌기 때문에 가끔 특별한 베갯수를 볼 수 있다. 임금의 하사에 감읍한 신하는 긴 글을 올린다. “하사받은 베개를 베고 곁에 두고, 분에 넘치는 베개를 받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베개는 이렇게 군신 간에도 애틋한 사랑을 전하는 증표가 되었다.

“애걔 이게 박물관이에요.” 창의 체험을 나온 어린 학생들이 자수박물관을 둘러보고 하는 말이다. 큰 박물관들만 둘러본 어린 학생들은 동네의 작은 박물관에서 실망하는 눈치다. 하지만 가까이 있어서 친근하고 작아서 포근하게 그 아이들을 보듬고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동네 박물관의 역할일 것이다. 언젠가 우리지역에도 친근하고 편한 박물관들이 동네의 이야기를 전하는 귀한 곳으로 곳곳에 세워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의 이야기까지 전해주는 곳이 되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