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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구일보] ‘도구 통해 정신에 이르다’ ‘붓속에 담긴 철학 전해야 2017.07.09
작성자 museum2017
작성일자 2017-08-10

새로운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정책들이 빠르게 쏟아져 나오고 미처 준비할 틈도 없이 시행되어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과거의 유산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온 역사의 뜰을 기억하는 일들이 현재를 더욱 든든하게 받쳐주는 일이라는 걸 잊은 적인 없다.



그 믿음이 어디에서 왔을까? 어린 시절 붓글씨를 쓰시는 아버지는 미리 먹을 갈아 둘 것을 내게 부탁하였는데 물은 연적에 담아 한 시간쯤 가라앉힌 다음에 거칠지 않고 고요하게 한 후에 벼루에 담아야 했다.



먹을 갈 때는 먹의 바닥면을 벼루에 직각으로 세워서 닳는 면이 늘 수평이 되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먹을 강하게 눌러서 갈면 입자가 거칠어 먹이 뻑뻑해지고 약하게 갈면 먹색의 깊이가 부족하니 손끝의 힘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하지 아니하고 손목을 부드럽게 쓰는 일이 중요한 일이었다.



자세도 끓어 앉아서 갈아야 하기 때문에 짧게는 10분 길게는 30분으로 이어지는 먹을 가는 시간은 그야말로 고행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기억에는 먹을 갈고 있는 사이 먹 향이 온 방을 채우는 것이 무척 좋았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천천히 먹을 갈아 연지의 먹색이 깊어지는 걸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던 그 시간이 참 좋았던 기억도 있다.

붓에 먹을 찍어 보시고 잘 갈았다고 해주실 때면 정말 기뻤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집과 꽤 떨어진 대구 반월당 사거리에 자리 잡은 큰 건물 안의 서예학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줄긋기를 거의 6개월이나 했던 것 같다.



한 붓에서 갈필이 나올 때까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길게 선을 늘여나가는 일이었다.

꼿꼿한 자세로 선을 지켜보면서 한 시간을 견디는 일은 여중생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 손에 먹이라도 묻어 있으면 정신을 집중하지 않았다고 야단을 맞았기 때문에 검은 먹을 다루면서도 항상 주변을 신경 써야 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은 것을 붓이 먼저 안다”고 하시며 “선이 콘크리트 위에 못을 그어 내리듯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

”고 하셨다.

“붓의 털 하나하나는 병사이고 그것이 모인 붓은 천만의 군사이니 그 군사를 잘 이끌어가는 장군의 기상으로 붓을 잡아야 한다.

”고 하셨다.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한일자를 배울 수 있었다.

방학이 되었고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머리가 눈처럼 하얗게 희었던 선생님은 눈길을 걸어 우리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어린 제자를 위해 새해 연하장으로 ‘美意進年(미의진년)’이라고 쓴 글귀를 품에서 꺼내 놓으셨다.

전서로 단정하게 쓰인 글을 받아들고 참으로 기뻤던 기억이 난다.

한 글자 한 글자 뜻을 새겨 주시던 그 모습이 생생하다.



스승은 가셨지만, 스승의 사랑은 지금 내가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해주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사람으로 이끌었다.

붓은 동양 3국의 중요한 도구이다.

개념이 조형을 만들어간다는 이론도 맞지만, 도구를 통해서 정신에 이르게도 된다.



그러므로 학교의 현장에서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 붓인 것이다.

붓을 통해서 선비가 가르치고자 했던 정신과 동양의 철학과 한국인의 가치를 전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해야 할 일은 그것을 현대적 상황과 교육과정에 맞게 연구하고 교육현장에 접목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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